마음의 여유/역사 탐방

묘청(妙淸)의 亂

원강한량 2006. 8. 22. 15:56
[정의]
고려 중기 승려 묘청이 서경에서 일으킨 반란.


[내용]
고려 제17대 왕 인종(仁宗)은 15세에 즉위하였으므로, 국내가 어지럽고 민심이 동요하여 음양지리설(陰陽地理說)이 횡행하였다. 밖에서는 금나라가 고려에 대해 위협했으며, 안으로는 이자겸의 난 등으로 정치 기강이 극도로 혼란한 시기였다. 이러한 풍조로 불안해진 국내정세와 유행하던 음양도참설을 교묘히 이용한 묘청은 인종 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하여, 국수주의적 입장에 서서 이미 지세(地勢)가 떨어진 수도 개경(開京:開城)에서 고려 조 중흥의 명당인 서경으로의 천도(遷都)운동을 전개하였다.

묘청 일파는 역대 고려사회의 민심을 지배해온 도참설에 의거하여 국수주의적 배타주의를 표방하고, 인종의 용기를 북돋워 개경의 유교주의·사대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서경천도운동을 추진하였다. 원래 서경은 개경에 이은 제2의 수도이자 북방정책의 전초기지였다. 그러나 고려 중기로 오면서 중국 대륙에 강성한 국가가 등장하면서 그 역할은 매우 퇴색하였다.

원래 묘청을 인종에게 추천한 사람은 시인이자 문신인인 정지상(鄭知常)이었는데, 백수한(白壽翰)과 더불어 서경에 왕기(王氣)가 있으니 서경으로 천도하면 일신의 부귀뿐만 아니라 자손대대 로 복을 누리게 된다고 주장하여, 왕의 측근자들과 조정의 대신들을 설득시켜 묘청을 성현(聖賢)으로 추천하여 모든 정사(政事)의 최고 고문으로 삼을 것을 건의하였다. 처음에는 유신들이 의심하여 반대했으나 결국 그들의 교묘한 음양설에 넘어가게 되어, 묘청 등은 인종의 서경행차에 성공하고 15조항의 유신정교(維新政敎)를 선포하 였다.

1128년 다시 서경의 임원역(林原驛)에는 대화세(大花勢)가 있으므로 그곳에 신궁(新宮)인 대화궁(大花宮)을 세우면 천하통일을 이루고, 금나라 및 그 밖의 많은 나라가 고려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이라 하여 서경천 도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당시 인종도 이자겸·척준경(拓俊京) 등의 난으로 궁궐이 소실되자 그해 11월부터 신궁건설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묘청 일파가 시도한 일련의 기만 행위가 폭로되면서 기존 권신들이 강경하게 반대하였고, 민심 또한 이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인종이 천도를 중지시키자 서경천도운동은 좌절되었다.

오랫동안 계획했던 천도운동이 좌절되자 묘청은 서기 1135년 서경의 분사시랑(分司侍郞) 조광(趙匡) 및 분사병부상서 유참(柳T) 등과 개경정부에 반기를 들고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부류현(副留縣) 수 령(守令) 이하 관리들을 잡아 가두는 한편, 자비령 이북의 길을 막고 서북 여러 고을의 군대를 모두 서경으로 집 결시킨 후, 국호를 대위국(大爲國), 연호를 천개(天開)라 선포하고,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불렀으며, 서북면의 모든 관청, 즉 주군수(州郡守)까지의 관리들을 서북인만으로 충당시킨 다음 개경으로 진격해 들어 갈 뜻을 밝혔다.

묘청 등의 반란에 직면한 중앙정부에서는 김부식(金富軾)을 평서원수(平西元帥)로 하여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김부식은 출정에 앞서 묘청 일파인 정지상·백수한·김안(金安) 등을 참수하고 좌·중·우 3군을 지휘하여 서북면으로 진격하였다.

관군이 안주(安州)에 이르는 동안 그 기세 에 눌려 도중의 모든 반란군은 항복하고 서경에도 7∼8차례 사람을 보내어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으므로, 승산이 없음을 안 반란군 주모자 조광 등이 묘청·유참 등의 목을 베어 항복의 뜻을 표시하고 죄를 용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조광 등의 죄를 용서할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이에 조광 등은 서경에서 약 1 년 동안 저항하였다. 그러나 포위당한 평양성에서는 식량부족으로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고, 36년 2월 관군의 총공격으로 조광 등이 전사함으로써 반란은 끝났다. 결국 묘청의 난은 약 1년만에 진압되었다.

[평가]
후세에 이 사건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특히 신채호 등은 묘청의 칭제 건원론(稱帝建元論)이나 금국정벌론(金國征伐論)은 민족 자주정신에 입각한 웅대한 기상의 표출로서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했다.

서경 전역(戰域)을 역대의 사가들이 다만 왕사(王師 : 김부식)가 반적(反賊)을 친 전역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의 관찰이다. 실상은 이 전역이 낭(郎)·불(佛) 양가 대 유가(儒家)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역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였으므로 조선의 역사가 사대적·보수적·속박적 사상, 즉 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승리하였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일천년래 제일대사건(一千年來第一大事件)’이라 하지 아니하랴.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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